"내 욕심이 아이 망쳤다" 목놓아 우는 엄마들
다움이
0
7481
2011.04.01 14:02
"내 욕심이 아이 망쳤다" 목놓아 우는 엄마들
한국일보 | 입력 2011.04.01 06:05 |
■ 책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아이들
"책만 많이 읽으면 똑똑해지는 줄 알았다가 날벼락"
↑ 한 어린이가 그림책을 읽고 있다. 전문가들은 나이에 따라 적절한 운동법이 있듯이 두뇌 발달 단계에 따라 필요한 독서법이 있다고 조언한다.
43개월 사내 아이 한새(가명)는 두 돌 전에 영어 알파벳과 한글을 읽기 시작했다. TV 화면에 영어 자막이 나오면 "케이, 에스, 더블유"하며 글자를 콕콕 집어냈다. 차를 타고 가면 길가의 간판들을 더듬더듬 읽었다. 주변에서는 다들 "영재 아니냐"고 부러워했다. 돌 무렵부터 읽어주기 시작한 그림책 덕분이었다. 책의 바다에 빠진 한새는 장난감도 싫어했고, 일과 시간의 대부분을 책만 보며 지냈다. 글자를 뗀 후엔 초등학교 3학년 형의 '어린이사전' '영어사전'까지 탐독했다.
소통이 불가능한 아이들
하지만 엄마 이민혜(38ㆍ가명)씨는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두 돌이 넘도록 한새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기 때문. "엄,마" 하면 "엄,마" 하고 겨우 따라할 뿐이었다. 책이 보고 싶으면 엄마 손을 이끌고 책장 앞으로 갔고, 목이 마르면 냉장고 앞으로 끌고 갔다.
간혹 또래 아이들과 모이면 혼자 등을 돌리고 책만 줄줄줄 읽어대는 모습에 이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억지로 아이들과 섞어놓으면 한새는 하고 싶은 말을 못해 답답해 하며 짜증을 냈다. 아이들도 함께 놀아주지 않았다. 병원 치료를 생각했지만 엄마로서 소아정신과는 내키지 않았다. '말이 좀 늦는거겠지' 하며 애써 자위하다 병원을 찾은 게 36개월 때. 병명은 '경계성 자폐'(유사자폐)였다. 한새의 독서는 의미도 모른 채 낭독만 능숙한 전형적인 초독서증. 이씨는 의사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애가 똑똑한 것 같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자극을 줬어요. 온종일 책만 읽혔고, 한글 영어 비디오 너무 많이 보여줬고…. 혼자는 못 사는 세상인데, 친구 하나 못 만들어준 게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파요."
이씨는 요즘 집안에 있는 책을 모조리 치우고, 아이와 바깥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한새는 아직도 세계 각국 이름과 수도, 국기를 외우는 취미를 버리지 못했다. 책을 치워도 문자는 도처에 널려 있다. 한새는 지하철을 타면 노선도를 외우고 놀이공원에 가면 안내도를 외운다.
다행스러운 건 치료를 받으며 한새가 제법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한 점이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자발어가 많이 늘었다. 하지만 아직도 질문에 답하는 반향어는 부족해서 "물 줄까"하고 물어보면 대답 대신 "물 줄까"를 따라하기만 한다.
때가 돼도 못 걷는 아이들
서른여덟에 첫 딸을 낳은 김지영(41ㆍ가명)씨는 육아에 관심이 많았다. 늦게 낳은 아이 잘 길러보려는 욕심에 처음 책을 읽어준 게 생후 6개월 무렵. 인터넷 육아 사이트와 블로그들을 보면 돌도 안 된 아기부터 유치원생까지 책의 바다에 빠진 아이들이 즐비했다. 김씨도 210만원에 전집 네 질을 들였다. 남편은 돌도 안 된 애기한테 무슨 책을 사주냐고 반대했지만, "이렇게 해야 나중에 사교육 따로 안 한다"는 아내 말에 고집을 꺾었다. 그렇게 읽은 책이 10개월에 500권, 두 돌 때는 1,000권이 넘었다.
아이는 생후 10개월부터 책 중독 증세를 보였다. 기저귀 갈고 젖 먹는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책만 찾았다. 엄마가 목이 쉬도록 읽어주면, 아이는 동공도 움직이지 않은 채 새벽 4~5시까지 책을 들여다봤다. 아이가 이상해졌다고 느낀 건 첫 돌이 지났을 때부터. 똘망똘망하고 모든 사물에 관심을 보이던 애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때가 돼도 아이가 기지 않고, 돌이 지나도 걷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유명 육아사이트는 그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몰입할 수 있다는 게 영재성의 증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기뻤어요, 이 미련한 엄마가. 책만 많이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말만 믿고 애를 망가뜨린 거죠."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책을 딱 끊은 게 두 돌 때. 한 눈에 보아도 다른 아이에 비해 신체 발달이 뒤떨어진 아이는 세 돌이 다 되도록 혼자 계단을 서너 개밖에 올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평범한 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자, 그저 많이 놀아주자, 애쓰고 있어요. 제가 책을 안 읽히겠다 마음 먹으니까 희한하게도 책에 빠져있던 아이가 금세 책에서 멀어지더군요. 아이들은 엄마의 눈빛을 통해 엄마가 뭘 아는지 온몸으로 간파하는 거예요. 그간 내가 아이를 학대했구나, 온몸으로 책 읽기를 강요 했구나 싶어 아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요."
공격성이 끓어오르는 아이들
명문대 출신의 주부 박유리(36ㆍ가명)씨는 최근 딸 은서(5ㆍ가명)를 데리고 소아정신과를 찾았다. 얼마 전 은서가 "엄마도 죽이고 싶어. 할머니도 찌르고 싶어. 나는 나쁜 애야"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에 놀라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의사는 "과잉독서 때문에 아이가 공격성 조절을 못한다"고 진단했다.
박씨는 이유식을 먹일 때부터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세 살부터는 도서관도 자주 다녔다. 아이가 좋아煞? 딱히 뭘 해줘야 할지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감정적 소통을 해야 할 시기에 책만 읽도록 한 것이 아이에게 심각한 손상을 초래했다. "책을 읽어주면 그저 좋은 줄로만 알았어요." 박씨는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흐느끼기만 했다. 은서 생후 5년 동안 엄마가 한 일이라곤 춥고 외로운 책의 바다에 아이를 구명조끼 하나 입히지 않고 던져놓은 것뿐이었으니까.
한국일보 | 입력 2011.04.01 06:05 |
■ 책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아이들
"책만 많이 읽으면 똑똑해지는 줄 알았다가 날벼락"
↑ 한 어린이가 그림책을 읽고 있다. 전문가들은 나이에 따라 적절한 운동법이 있듯이 두뇌 발달 단계에 따라 필요한 독서법이 있다고 조언한다.
43개월 사내 아이 한새(가명)는 두 돌 전에 영어 알파벳과 한글을 읽기 시작했다. TV 화면에 영어 자막이 나오면 "케이, 에스, 더블유"하며 글자를 콕콕 집어냈다. 차를 타고 가면 길가의 간판들을 더듬더듬 읽었다. 주변에서는 다들 "영재 아니냐"고 부러워했다. 돌 무렵부터 읽어주기 시작한 그림책 덕분이었다. 책의 바다에 빠진 한새는 장난감도 싫어했고, 일과 시간의 대부분을 책만 보며 지냈다. 글자를 뗀 후엔 초등학교 3학년 형의 '어린이사전' '영어사전'까지 탐독했다.
소통이 불가능한 아이들
하지만 엄마 이민혜(38ㆍ가명)씨는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두 돌이 넘도록 한새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기 때문. "엄,마" 하면 "엄,마" 하고 겨우 따라할 뿐이었다. 책이 보고 싶으면 엄마 손을 이끌고 책장 앞으로 갔고, 목이 마르면 냉장고 앞으로 끌고 갔다.
간혹 또래 아이들과 모이면 혼자 등을 돌리고 책만 줄줄줄 읽어대는 모습에 이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억지로 아이들과 섞어놓으면 한새는 하고 싶은 말을 못해 답답해 하며 짜증을 냈다. 아이들도 함께 놀아주지 않았다. 병원 치료를 생각했지만 엄마로서 소아정신과는 내키지 않았다. '말이 좀 늦는거겠지' 하며 애써 자위하다 병원을 찾은 게 36개월 때. 병명은 '경계성 자폐'(유사자폐)였다. 한새의 독서는 의미도 모른 채 낭독만 능숙한 전형적인 초독서증. 이씨는 의사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애가 똑똑한 것 같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자극을 줬어요. 온종일 책만 읽혔고, 한글 영어 비디오 너무 많이 보여줬고…. 혼자는 못 사는 세상인데, 친구 하나 못 만들어준 게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파요."
이씨는 요즘 집안에 있는 책을 모조리 치우고, 아이와 바깥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한새는 아직도 세계 각국 이름과 수도, 국기를 외우는 취미를 버리지 못했다. 책을 치워도 문자는 도처에 널려 있다. 한새는 지하철을 타면 노선도를 외우고 놀이공원에 가면 안내도를 외운다.
다행스러운 건 치료를 받으며 한새가 제법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한 점이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자발어가 많이 늘었다. 하지만 아직도 질문에 답하는 반향어는 부족해서 "물 줄까"하고 물어보면 대답 대신 "물 줄까"를 따라하기만 한다.
때가 돼도 못 걷는 아이들
서른여덟에 첫 딸을 낳은 김지영(41ㆍ가명)씨는 육아에 관심이 많았다. 늦게 낳은 아이 잘 길러보려는 욕심에 처음 책을 읽어준 게 생후 6개월 무렵. 인터넷 육아 사이트와 블로그들을 보면 돌도 안 된 아기부터 유치원생까지 책의 바다에 빠진 아이들이 즐비했다. 김씨도 210만원에 전집 네 질을 들였다. 남편은 돌도 안 된 애기한테 무슨 책을 사주냐고 반대했지만, "이렇게 해야 나중에 사교육 따로 안 한다"는 아내 말에 고집을 꺾었다. 그렇게 읽은 책이 10개월에 500권, 두 돌 때는 1,000권이 넘었다.
아이는 생후 10개월부터 책 중독 증세를 보였다. 기저귀 갈고 젖 먹는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책만 찾았다. 엄마가 목이 쉬도록 읽어주면, 아이는 동공도 움직이지 않은 채 새벽 4~5시까지 책을 들여다봤다. 아이가 이상해졌다고 느낀 건 첫 돌이 지났을 때부터. 똘망똘망하고 모든 사물에 관심을 보이던 애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때가 돼도 아이가 기지 않고, 돌이 지나도 걷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유명 육아사이트는 그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몰입할 수 있다는 게 영재성의 증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기뻤어요, 이 미련한 엄마가. 책만 많이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말만 믿고 애를 망가뜨린 거죠."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책을 딱 끊은 게 두 돌 때. 한 눈에 보아도 다른 아이에 비해 신체 발달이 뒤떨어진 아이는 세 돌이 다 되도록 혼자 계단을 서너 개밖에 올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평범한 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자, 그저 많이 놀아주자, 애쓰고 있어요. 제가 책을 안 읽히겠다 마음 먹으니까 희한하게도 책에 빠져있던 아이가 금세 책에서 멀어지더군요. 아이들은 엄마의 눈빛을 통해 엄마가 뭘 아는지 온몸으로 간파하는 거예요. 그간 내가 아이를 학대했구나, 온몸으로 책 읽기를 강요 했구나 싶어 아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요."
공격성이 끓어오르는 아이들
명문대 출신의 주부 박유리(36ㆍ가명)씨는 최근 딸 은서(5ㆍ가명)를 데리고 소아정신과를 찾았다. 얼마 전 은서가 "엄마도 죽이고 싶어. 할머니도 찌르고 싶어. 나는 나쁜 애야"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에 놀라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의사는 "과잉독서 때문에 아이가 공격성 조절을 못한다"고 진단했다.
박씨는 이유식을 먹일 때부터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세 살부터는 도서관도 자주 다녔다. 아이가 좋아煞? 딱히 뭘 해줘야 할지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감정적 소통을 해야 할 시기에 책만 읽도록 한 것이 아이에게 심각한 손상을 초래했다. "책을 읽어주면 그저 좋은 줄로만 알았어요." 박씨는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흐느끼기만 했다. 은서 생후 5년 동안 엄마가 한 일이라곤 춥고 외로운 책의 바다에 아이를 구명조끼 하나 입히지 않고 던져놓은 것뿐이었으니까.